너무도 오랜 인연인가 보다
그 인연이 시작도 있었고 끝도 있었다
시작은 우연이였이였지만 끝은 분명 자의적이었다
20대에 만났던 그녀는 매우 발랄하고 명랑하였으며 사교적이었다
교회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교회직분을 잠시 맡고 있었다
평신도이였던 나는 항상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하곤 하였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서로가 결혼을 하기로 내심 같은 마음을 품었지만
고백하고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공무원시험에 합격해서 지방에서 몇 년을 근무하고
서울로 다시 왔을 때에도
그녀는 변함없이 내 주위에 언제나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 마땅한 혼처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권고를 거절 할 수 없어 맞선을 보게 되었는데
그만 거절 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어머니께 마음에 드는 여자가 따로 있다고 그녀를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 집 가정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터라
내심 반대하면서도 다른 이유를 대었다
“그 애는 키가 너무 작아 그래서 너하고는 안 맞아”
그때였다. “탕”하고 대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집에 왔다가
그 말을 듣고 황급히
대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였다.
맞선녀와 자주 만남에 따라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맞선녀는 그녀를 한번 만나게 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셋이서
다방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약속시간 보다 먼저 다방에 도착해서 그녀에게
내게 대한 확실한 답을 해 달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내게 젊은 남자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제가 혼인하기로 한 사람이에요, 부대 행복하게 잘 사세요.”
(나중에 들은 얘기는 그 남자는 교회 다니는 분의 사진을 잠시
빌려 왔다고 해 주었다)
맞선녀와 그녀 그리고 나는 다방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맞선녀와 같이 남산길을 거닐었는데
나중에 아내가 된 맞선녀는 자기를 버려두고 그녀와 같이
남산 길을 걸었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수십 년 동안 들볶이고 살아야만 하였는데
그녀는 자기를 벼려두고 맞선녀와 둘이 남산길로 같이 걸어 갔다고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다
둘은 한동네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가정생활을 여러 가지로 평탄치 않았다
어머니로 통해서 주변사람들로부터 자주 들려온다
나 역시 순탄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늦은 나이에 군대를 입대하면서 실직하게 되어
집안에 어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노점장사를 시작했고 돌아오는 저녁시작이면
가끔씩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라기가
여러 번 이었는데 그녀 역시 나와 같이 노점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서로 못 본 채 고개를 돌리곤 하였다
지금 생각 해 보면 그날은 아내에게 유난히도 들볶이던 밤이었던
날 이었으리라.
1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
둘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학부모와 같이 등교하는 날이었다. 아내가 참석할 수 없어서
내가 대신 학교에 딸의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서는 순간
내 옆에 다정하게 앉아서 내손을 잡아 주는
누가 있었다.
바로 그녀 였다. 몇 마디를 감격하며 편하게 나누었다.
......
다시 10년이 지난 후
회사로 그녀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노터치 그냥 이야기만 하자는 조건으로
어디든 터치한다면 그녀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내게 확고하게 말했지만...
“어찌 그리 무심했소”
“미안해요. 이 세월동안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요.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 병으로 사경을 헤메인다는 소식을 아내가
전해준 일이 생각이 났다.
“남은 기간 동안 이렇게 지내다 갔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언제나 밖에서 일어난 다른 일은 아내는 모두 다 알고 있기에
내 행동에는 감히 거짓을 고했다간 죽은 목숨이 되도록 시달림을 받아야 한다
그 시작은 왜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느나고 따지면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면
새벽2시 늦으면 새벽4시까지 달래주고 말을 순순히 들어주어야 화해가 된다
그런데 그녀와 만남은 전혀 모른 듯 했다
그녀는 그 후 어찌 된 일인지
건강을 회복하고 모든 생활이 정상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나와의 만남에서 병의 근원이 치유된 것일까?
....
가정에는 전혀 문제됨이 없었다
전화를 할 때면 다른 여자를 시켜 전화를 돌려 받거나 직접 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있어 여간 신경이 써지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헤어져야 할 때가 온것일까?
나는 학업에 전념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녀의 전화번호는 언제나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기도할때마다 “나같이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지금도 죄인으로 남아 있다.
전화기 앞에서는 언제나 그녀의 전화번호가 먼저 생각이 난다.
공중전화에서 전화 해 볼까?
안 돼, 이제는 잊어야해. 더 이상은 안 돼..
치유되지 않는 세월이 다시 10년이 흘렀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를 위한 벽속의 방은 항상 남겨두고 있었다
‘어떻게 내 연락번호를 알려줄까?’
‘옛날처럼 다시 전화를 걸려오지 않을까?’
‘그러면 어떻게 하지’
“안 돼 이대로 참아야해.”
어느 날 아내가 그녀의 오빠가 돌아가셨는데 문상을 다녀오라고 한다.
‘거기서 만나면 되겠구나’
잠시 후 아내는,
“문상 가지 마세요”
“괜히 그녀 만나면 마음만 아파질거니까요”
...
최근 그녀 집 근처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더구나 야근을 자주하는 곳이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녀의 전화는 버튼만 누르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그녀를 상상하면서도
‘안 돼 더 이상 회개할 일을 만들 수는 없어...’
‘아직 그때 일을 용서 받지 못했는데...’
그녀를 만난 후 20여년을 이렇게 보냈다.
우연이 진리라면 반드시 필연을 수반한다
이 세상에 살아있기에 그 만남은 신비하기만 하다
퇴근 후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지하철환승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꿈에도 그리던 그녀를 보았다
작은 키에 이마가 드러나 보이게 머리를 위로 올리고
이른 봄 제법 날씨가 쌀쌀한데도 봄을 맞이하는 옅은 하늘색 상하를
입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의 깨꼼하던 얼굴은 매끈하게 희어졌고
이제는 귀부인이 된 모습처럼 우아하게 키 큰 사람들 가운데 서 있었다
분명 성형수술을 하고 피부도 주근깨를 말끔히 뺀 하얀 피부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천상의 모습이었다
다만 입가에 잔주름만이 그녀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열차가 왔음에도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타지 않고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조금 떨어진 지하철 플렛홈에서 그녀를 보며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그녀가 열차에 타서 자리를 잡고
나 역시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 틈으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다가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떠하였을까를 상상하면서도 몇 정거장을
오는 동안 수 많은 생각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생각이 생겨나고 또 사라졌다
‘고맙구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이렇게 너를 본 것 만 으로도 나는 만족해...’
‘저렇게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너도 편안하게 살고
나도 이젠 편안하게 살아가야지‘
문득 병원침대에서 최후를 맞이 할 내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지난날 아름다웠던 일들을 상상하면서 빙긋이 환하게 웃으며 편하게 아주
편하게 세상을 펀안한 마음으로 떠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너를 가두워 두었던 방문을 활짝 열고 너를 넓은 창공으로 날려 보낼 수 있어’
‘너를 가두어둔 빈방에는 향기로운 꽃들로 가득 채울거야’
왕자를 사랑하다 죽음을 맞이한 인어공주처럼
바람이 되어 왕자를 스치고 지나가며 하는 말처럼...
“안녕!” “이제 다시 만나지 않아도 만족해요”
“그대도 나를 찾지 말아요. 언젠가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
......
갑자기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지고 무거웠던 머리가 시원해졌다
억지로 잊으려고 애쓰던 그녀의 전화번호도
이제는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판처럼 감각없이 지나갔다.
50년이 넘는 기나긴 인연이 이렇게 편하게 지나갔다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를 다시 돌이키지는 못하였다
내가 갑자기 성인(聖人)이 된 것처럼
세상의 삶의 일부분을 깨우친 기쁨을 얻은 것처럼
그녀를 다시 만난 기쁨보다 더
그녀를 보내준 것을 더 기쁨이 훨씬 더 켰다
이제야 지난날 나의 잘못됨을 용서 받은 거룩한 순간이다
“내 평안을 네게 주리니 세상이 이는 주는 평안이 아니니라”
그녀를 내 마음에서 해방 시키고 나니
무엇엔가 이끌려 무겁고 어두움에서 나와 밝은 세상으로 이끌려 나왔다
하늘이 열리고 발이 들려 올리고 몸이 둥실 떠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지하철에서 내렸고 그녀는 어디론가 계속 가버렸다.
‘저런 모습이라면 어딘가 좋은 곳으로 가는 중이러니....’
세상은 나에게만 우연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어느 곳에서 몰래 숨어서 나를 바라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누가 알랴마는....
이미 많이 늙어버린 몸과 마음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남은 삶이 지나온 삶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일게다
이래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지
또 버려야 될 것을 찾아내야 되겠다
1037은 그녀의 전화번호 뒷자리다